[지적박물관] 독도의 권원(權原)을 지킨 조선산악회의 과업 재조명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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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노상학 지적 박물관 학예연구사
1905년 2월 22일 우리 섬 독도가 ‘다케시마’란 명칭으로 일본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된 후 이 섬의 수난사는 시작되었다.
그해 5월 러일전쟁의 최후 승부는 평화롭게 어로 활동을 해야 할 독도 근해에서 27척의 일본 함대가 후퇴하는 5척의 발틱 함대 함정을 포위하자 러시아가 백기를 들면서 끝이 났다.
이후 5년 만에 조선이 강제 병합되면서 광복이 되기까지 독도는 40여 년간 흑역사였다.
광복 후 우리 국토에 대한 연구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울릉도와 독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7년 조선산악회가 당시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를 중심으로 민관합동의 제1차울릉도 학술조사대를 결성하여 송석하 국립민속박물관장을 대장으로 울릉도 및 독도연구에 학술반, 동물반, 식물반 외 총 6개 반으로 편성하여 투입하였다.
이후, 1952년 및 1953년에도 한국산악회로 개칭한 후 두 차례 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여 탐사를 이어나갔다.
사실, 그 당시 조선(한국) 산악회가 추진한 학술 활동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지금도 생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 80여 명이 울릉도 학술조사대의 조직에 참여하여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뱃멀미를 해가며 얻으려고 했던 목적은 무엇이며, 계획서나 연구실적 등을 남기려고 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독도의 실효 지배를 통해 우리 권원(權原)을 지키고 국제법상 증거능력을 확보하여 영토 주권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또한 장차 예견되는 영토문제에 대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물증을 후대에 반듯하게 남기고자 한 집념으로 어찌 보면 국가가 그들에게 부여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전후(戰後) 한국은 열강들에 의해 광복은 되었지만 신생 약소국가로서 내 영토 내 강산을 우리 손으로 지키려는 마음과 열정 말고는 대외적으로도 호소할 여력이 부족했다.
1946년 초부터 패전국가인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진행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에서는 독도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후 무려 20여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51년 8월에 확정된 최종안에서는 안타깝게도 독도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빠지고 만다.
이에 대해 아직까지도 이 조약에 대해 한국과 일본 간 현저한 입장 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한국산악회에서는 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4월 28일 이후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 해올 것이라는 야욕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래서 3차에 걸쳐 독도에 대한 탐사를 통해 측량·측지 및 지질·광물 조사를 실시하고 영토 표지석을 설치하는 등 학술 증거 자료를 남겨 후세가 대비하도록 노력한 흔적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빛나는 학술적 자료와 공적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케비넷 속 과거의 유물로 잊혀 간다는 현실이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필자는 독도의 권원을 지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 그들의 과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 하는 기회가 자주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자라나는 세대의 독도 교육에도 반드시 포함시켜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에 대해 역사 및 학술적 근거를 제시한 업적을 널리 알려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독도의 달’을 맞이하여 많은 관련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특히 특화된 독도 학술조사 전시나 차별화된 독도 교육 페스티벌 행사가 눈에 띄어 독도의 달에 의미를 더하였다.
그렇지만 독도에 대한 관심과 행사가 여전히 일부 지역적인 행사로만 그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관련 지자체 및 전문단체에서도 독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나 성과등을 꾸준히 발굴하여 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만나려는 노력을 더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도 독도에 대한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분기탱천하기보다는 이러한 전시나 행사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해 보는 것이 작지만 내실 있는 독도 사랑과 앎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 본다.
출처 : 충청일보(https://www.ccdailynews.com)
1905년 2월 22일 우리 섬 독도가 ‘다케시마’란 명칭으로 일본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된 후 이 섬의 수난사는 시작되었다.
그해 5월 러일전쟁의 최후 승부는 평화롭게 어로 활동을 해야 할 독도 근해에서 27척의 일본 함대가 후퇴하는 5척의 발틱 함대 함정을 포위하자 러시아가 백기를 들면서 끝이 났다.
이후 5년 만에 조선이 강제 병합되면서 광복이 되기까지 독도는 40여 년간 흑역사였다.
광복 후 우리 국토에 대한 연구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울릉도와 독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7년 조선산악회가 당시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를 중심으로 민관합동의 제1차울릉도 학술조사대를 결성하여 송석하 국립민속박물관장을 대장으로 울릉도 및 독도연구에 학술반, 동물반, 식물반 외 총 6개 반으로 편성하여 투입하였다.
이후, 1952년 및 1953년에도 한국산악회로 개칭한 후 두 차례 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여 탐사를 이어나갔다.
사실, 그 당시 조선(한국) 산악회가 추진한 학술 활동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아 지금도 생소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당시 80여 명이 울릉도 학술조사대의 조직에 참여하여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뱃멀미를 해가며 얻으려고 했던 목적은 무엇이며, 계획서나 연구실적 등을 남기려고 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독도의 실효 지배를 통해 우리 권원(權原)을 지키고 국제법상 증거능력을 확보하여 영토 주권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또한 장차 예견되는 영토문제에 대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물증을 후대에 반듯하게 남기고자 한 집념으로 어찌 보면 국가가 그들에게 부여한 과업이었다.
그러나 전후(戰後) 한국은 열강들에 의해 광복은 되었지만 신생 약소국가로서 내 영토 내 강산을 우리 손으로 지키려는 마음과 열정 말고는 대외적으로도 호소할 여력이 부족했다.
1946년 초부터 패전국가인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진행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에서는 독도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이후 무려 20여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51년 8월에 확정된 최종안에서는 안타깝게도 독도가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빠지고 만다.
이에 대해 아직까지도 이 조약에 대해 한국과 일본 간 현저한 입장 차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당시 한국산악회에서는 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4월 28일 이후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 해올 것이라는 야욕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래서 3차에 걸쳐 독도에 대한 탐사를 통해 측량·측지 및 지질·광물 조사를 실시하고 영토 표지석을 설치하는 등 학술 증거 자료를 남겨 후세가 대비하도록 노력한 흔적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빛나는 학술적 자료와 공적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케비넷 속 과거의 유물로 잊혀 간다는 현실이 후학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필자는 독도의 권원을 지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린 그들의 과업을 재조명하고 재평가 하는 기회가 자주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자라나는 세대의 독도 교육에도 반드시 포함시켜 독도가 우리 영토라는 사실에 대해 역사 및 학술적 근거를 제시한 업적을 널리 알려야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독도의 달’을 맞이하여 많은 관련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특히 특화된 독도 학술조사 전시나 차별화된 독도 교육 페스티벌 행사가 눈에 띄어 독도의 달에 의미를 더하였다.
그렇지만 독도에 대한 관심과 행사가 여전히 일부 지역적인 행사로만 그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관련 지자체 및 전문단체에서도 독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나 성과등을 꾸준히 발굴하여 전시를 통해 관람객을 만나려는 노력을 더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도 독도에 대한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분기탱천하기보다는 이러한 전시나 행사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해 보는 것이 작지만 내실 있는 독도 사랑과 앎이 아닐까 문득 생각해 본다.
출처 : 충청일보(https://www.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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